<기획> 이재명의 반복인가

운영자 | 2012.02.17 18:50 | 조회 347

덕산 스님이 깨치지 못했을 때 입으로 다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분해 남방에 가서 교리 밖에 특별히 전했다는 뜻을 쓸어 없애버리려고 예주 땅에 이르렀다. 때가 되어 길가 떡 파는 노파에게 점심을 사먹으려 하니 노파가 물었다. "스님의 바랑 속에 무슨 글이 들어 있습니까?". 덕산스님이 금강경소초라고 대답하니 노파가 다시 물었다. "금강경에 과거심도 얻을 수 없고 현재심도 얻을 수 없고 미래심도 얻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님은 어떤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렵니까?" 덕산 스님은 그만 입이 꽉 막혀 버렸다.(《無門關》)

 

시간은 흐른다. 그것은 흔히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된다. 과거에서는 현재, 미래를 볼 수 없다. 과거는 이미 흘러 가버렸기 때문에. 미래에서도 과거, 현재를 볼 수 없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현재에서는 과거도 미래도 볼 수 있다. 과거는 이미 흘러 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은 과거가 미래보다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현재가 과연 있는 것일까?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만약 현재가 있다면 그 현재는 '있는' 순간 '부재'한다. 현재는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시간의 아포리아'다. 시간의 아포리아에 따르면 현재도 있는 것일 수 없다. 현재가 없다면, 과거도 미래도 있을 수 없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구분은 인위적이다. 그러나 무용하지 않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회상, 미래에 대한 희망, 현재에 대한 최선 없이는 인간의 삶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기에. 이 유용하지만 자의적인 시간 표상은 어디서 왔을까? '순간'에서 왔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형식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느낀다, 순간의 존재를. 과거니 현재니 미래니 하는 자의적인 시간 표상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다. 두 번 다시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일회성, 두 번 다시 같은 시간으로 반복되지 않는 고유성, 그것이 순간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은 다른 순간과 비교 불가능하다.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리하여 역사에게도.

 

순간을 사는 인간이 있다. 매 순간의 차이를 즐기는 인간이 있다. 그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있다면 오로지 차이나는 매 순간이 있을 뿐이다. 이보다 충만하고 아름다운 시간은 없을 것 같다. 이런 매 순간을 벤야민은 살았던 것 같다. "로베스피에르에게 고대 로마는 순간의 시간에 의해 충만된 과거였다"(〈역사철학테제〉)고 썼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에 근거한 진보'와 '교조적 요구를 지닌 진보'를 구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에 따르면 교조적 요구를 지닌 진보는 '아직 완결되지 않은 진보', 따라서 '끝없이 발전하는 진보'다. 이 점에서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에 의존한다. 그가 바로 '사회민주주의'라고 명확히 꿰뚫어 본 것이기도 하다. 반면에 현실에 근거한 진보는 오직 순간을 산다.

 


최근 '황규식은 엉터리'라는 글을 썼다. 쓰고 나서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그가 엉터리인지 궁금했다.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가 유권자들에게 제공하는 매체인 그의 블로그를 알게 되어 들여다보았다. 까무러쳤다! 황규식은 장황하게도 자신의 과거를 낱낱이 공개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과거일까?

 

어린 시절 중학생들과의 싸움에서 얻은 승리로 '황장군'으로 불리었다, 가난을 무릅쓰고 열심히 공부했다, 고려대 입학 후 사회적 모순에 눈을 떠 이념써클을 조직하고 의식화학습을 했다, 학생운동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노동운동 과정에서 구국전위사건과 성남지역노동자회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했다, 성남참여자치시민연대 집행위원장을 했다 등등.

 

그러므로 설령 그가 분당갑의 최종 주자가 되고 마침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해도 있을 수도 있는 이 새로운 사건조차 그의 과거의 연장에 지나지 않다. 그래서 뭘 어쩌라구! 그에게는 한 마디면 족할 것 같다. '황규식은 과거로 먹고 산다'. 그러나 동일한 시간대에 사회주의는 망해 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80년대 말로 종말을 고해 버렸다.

 

이것은 그의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어떠한 과거도 흘러가버린 과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난 80년대나 또는 누군가에게는 그 연장에 있는 시간대조차 역사로 돌려보내야 하는 이유다. 황규식처럼 아직도 과거의 연장선에 선 자들이 있다. 그들은 벤야민에 따르면 '교조적 요구를 지닌 진보'에 속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황규식은 이재명의 반복일 수 있다. 구체적으로 그가 낱낱이 보여준 '과거'와 앞서 그가 보여준 '엉터리'는 큰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재명은 과거를 팔아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시장으로서 그를 겪는 시민, 언론에게 그의 과거와 시장으로서의 매 순간은 큰 괴리가 있다. 그의 과거가 '겉모양'에 지나지 않다는 의문이 강하게 제기되는 이유다.

 

실마리가 있다. 이재명이 성남시장 후보 당시 한 토론회에서 "나는 소년노동자 출신으로 시민운동가를 거쳤다"며 "당신은 최고 좋은 대학 출신에 관료생활도 승승장구했으니 서민들의 삶을 제대로 알겠냐"는 공격을 가한 일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대 부르주아' 식이다. 토론회 후 그에게 말했다. "그런 공격도 다 있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선거전략상."

 

흔히 어떤 특정 이미지로 표상되는 전기적 사실과 매 순간의 그는 전혀 상관이 없다. 가령 남이 어떻게 보든 어제의 도둑놈이 오늘부터 개과천선해서 도둑놈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역사학에서 주류였던 실증주의적 역사관이 붕괴되고 만 것도 이 사실을 간과한 데 있다. '자신의 역사성'을 묻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와 다른 또 다른 개인이 '타자'로서 맞서기 때문이다. 이런 공시적인 관계야말로 역사, 일회적이고 고유한 사실로서의 역사일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그럼으로써 현재가 과거에 흡수되는 그런 역사가 역사일 리 만무하다. 역사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일회적이고 고유한 사실로서의 역사뿐일 것이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나의 전기에 맞춰 말하는 것은 '발생학적 오류(genetic fallacy)'에 지나지 않다. 황규식처럼 지난 80년대를 보낸 자들 중에는 이런 자들도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것으로 족하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수치였다.' 나와 그녀, 내 벗들과 내 말에 귀를 기울어준 후배들이 그렇다. 이따금 돌이키면 아름답고 슬프다. /마인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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